동유럽의 호나우도 미야토비치 Predrag Mijatovic - 유럽축구 레전드 , 발칸의 속사포

동유럽의 호나우도라 불렸던 사나이 유고 폭격기 미야토비치(Predrag Peda Mijatovic)는 1969년생으로 레알마드리드의 전설적인 선수입니다. 레알 마드리드에게 32년만의 UEFA 챔피온스리그 우승을 선사한 미야토비치는 유고 슬라비아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알려져있습니다.

1987 칠레 세계 청소년 월드컵 유고슬라비아 우승의 주역 미야토비치 & 수케르

 

미야토비치는 1969년 7월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포도고리카에서 치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7살 시절 지역팀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이어가면서 유고슬라바이의 명문 구단 '파티잔 베오그라드'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어린나이에 참여한 1987년 칠레 세계 청소년 월드컵에서 엄청난 기량을 선보이며 자국을 우승으로 이끌며 전세계의 주목을 끌게 됩니다. 이때당시에 우리에게도 유명한 다보르 수케르 (Davor Suker)가 미야토비치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의 공격을 이끌었답니다. 대회 이후 미야토비치는 파티잔 베오그라드로 이적하게 됩니다.

 

90년대 유럽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화약고라 불리며 위기의 나날들을 이어갔던 발칸반도의 유고슬라비아는 내전으로인하여 축구리그가 제대로 이뤄지기에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답니다. 어쩔 수 없이 미야토비치는 해외리그로 이적을 해야했고 동유럽 선수들의 진출이 많지 않았던 프리메라리가에 도착하게됩니다. 우리에게도 너무도 유명한 박쥐군단 '발렌시아'가 그의 해외진출 첫 프로팀이였습니다. 이적료는 300만 달러로 알려져 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 UEFA 챔피온스리그 결승골의 주인공 미야토비치

 

발렌시아에서 서서히 자신의 기량을 만개하던 미야토비치는 결국 95-96시즌 28골을 터트리며 레알 마드리드( Real Madrid )를 반하게 만들었고 발렌시아 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900만 달러의 당시로서 매우 높은 이적료를 기록하며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게 됩니다. 이때 발렌시아 구단의 영향이 더 컸던 것으로 저도 들었던것 같아요 미야토비치로써도 구단에서 이적을 하라하고 레알마드리드라는 세계적인 팀의 유혹을 이겨내긴 힘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발렌시아 팬들은 분통을 터트리며 그를 유다토비치(Judatovic)라고 부르게 됩니다. 예수를 배신한 제자 유다에 미야토비치의 이름을 합성한 별명이였죠 ^^;

 

당시 레알 마드리드에는 1987 칠레 세계 청소년 월드컵의 유고슬라비아 우승 또다른 주역인 수케르가 뛰고 있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로써는 그때 칠레의 충격적인 투톱을 다시 재현하고 싶었습니다.

1998년 5월 20일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후반 65분 미야토비치는 왼발로 결승골을 터트렸습니다. 결국 미야토비치와 수케르는 한골을 지키며 팀을 UEFA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칠레 청소년 월드컵 유고의 투톱을 재구성한 마드리드의 선택이 옳았음을 세상에 증명했습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유럽예선 최다 득점자 , 호나우도의 공인된 라이벌로 등극

 

당시 1998 프랑스 월드컵도 있었는데요 유럽예선에서 가장 많은 골을 터트린 선수가 바로 프레그리그 미야토비치 였습니다. 또한 그때 당시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인 브라질의 호나우도 ( 현재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노 호나우도가 아닌 ) 가 최고의 라이벌로 말한 유일한

 사람이 미야토비치였죠

 

Ronaldo and Zidane

이 글에 나오는 모든 호나우도는 위 사진 속의 브라질 전설 호나우도입니다 ^^

 

1990년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른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내전등의 이유로 UN의 제재조치에 유로92 본선에 불참하게 되고 - 이때 대신 올라간 덴마크가 유로92를 우승하는 기적을 만들어내죠 - 94월드컵도 불참... 정말 오랫만에 메이저 대회를 맞이하는 상황이였습니다. 미야토비치는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때문에 국제대회참가 경력이 많지 못해 덜 알려진 비운의 선수이기도 합니다.

 

1998년 월드컵을 맞이하는 유고슬라비아는 과거 칠레 청소년 월드컵의 대단한 멤버들이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였지만 크로아티아등의 나라들이 유고연방에서 분리 독립함에 따라서 전력의 누수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후 유고슬라비아 마저도 분리되며 미야토비치는 몬테네그로 국적을 갖게 됩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유고슬라비아는 16강 진출에 성공하지만 네덜란드와의 대결에서 패배하며 8강진출에는 실패하게 됩니다. 1:1의 상황에서 네덜란드 수비수 야프 스탐의 반칙으로 페널티킥을 얻는 유고슬라비아는 키커로 미야토비치를 선택했고 불행하게도 미야토비치는 패널티킥을 실축하며 많은 팬들에게 아쉬움을 보여줬습니다. 제가 유고슬라비아를 매우 열심히 응원했는데 더구나 당시 제일 좋아하던 미야토비치 선수가 실축하는걸 보니 가슴이 찡하더군요 ( 미야토비치가 실축한 페널트킥은 98월드컵에서 유일한 페널티킥 실축으로 남았답니다...)

 

이후 미야토비치는 인터뷰에서 레알마드리드의 챔피온스리그 결승골과 16강에서 실축한 페널티킥을 맞바꾸고 싶냐는 질문에 오랜 시간을 기대한 국민들에게 큰 중대사였고 선수들 또한 남다른 기대를 갖고 참여한 대회기때문에 바꾸고 싶다고 말해 더욱더 안타까움을 남겼습니다.

 

빠른발을 가졌으며 강력한 슈팅을 보유한 발칸의 속사포 ' Mijatovic '

발칸의 속사포라 불리우며 당시 최고의 선수 호나우도의 라이벌로써 유럽축구를 호령했던 미야토비치는 1999년 레알 마드리드 감독 존 토샥과 불화로 98/99시즌이 끝난 후 이탈리아의 명문 피오렌티나로 이적합니다. 그러나 부상등 컨디션 난조로 제대로된 활약을 펼지지 못하며 키에사, 누노 고메즈등의 스타플레이어들에게 밀리는 듯한 인상을 줬답니다. 사실 그때 당시의 피오렌티나 팀자체가 정상적인 모습이 안되었기에 미야토비치도 휩쓸린 경향이 있던것 같아요 피오렌티나는 2001/2002시즌에 강등당하며 자유계약으로 그를 풀어줍니다.

 

피오렌티나를 떠난 후 당시 스페인 2부리그 소속인 레반테에 자리를 잡고 아마토(Amato) 선수와 함께 주전으로 활약했습니다. 레반테는 미야토비치가 처음 스페인에서 만난 발렌시아CF와 연고지가 같은 팀으로 그에게 심적인 안정을 주기에 충분한 곳이였습니다. 적지않은 나이가 되서도 레반테에서 활약하며 컨디션을 유지하던 미야토비치는 유로2004 예선에서 국가대표팀 주전 스트라이커로 다시 출전하기도 하였답니다 ^^

 

 

미야토비치 소속팀 기록 MIJATOVIC RECORD

 

파티잔 베오그라드 Partizan Belgrade 

1989/90 시즌 : 15경기 1골

1990/91 시즌 : 32경기 14골

1991/92 시즌 : 25경기 13골

1992/93 시즌 : 31경기 17골 34도움

 

발렌시아 Valencia

1993/94 시즌 : 35경기 16골

1994/95 시즌 : 29경기 12골

1995/96 시즌 : 40경기 28골

     - 프리메라리가 올해의 선수-

 

레알 마드리드 Real Madrid

1996/97 시즌 : 38경기 14골

1997/98 시즌 : 24경기 10골

1998/99 시즌 : 28경기 5골

 

피오렌티나 Fiorentina

1999/00 시즌 : 16경기 2골

2000/01 시즌 : 13경기 1골

2001/02 시즌 : 13경기 1골

 

 

   미야토비치의 국가대표 기록

미야토비치 프로필 Predrag Peda Mijatovic Profile

 

출생 : 1969년 1월 19일 , 유고슬라비아 포도고리카

키 : 178cm 몸무게 71kg

 

미야토비치 스페셜 영상

 

 

파란만장한 미야토비치의 삶

가슴아픈 안드레아 미야토비치

미야토비치가 유럽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을 당시 그에게는 아픈 아들이 있었습니다. 1998년 챔피온스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리던해 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뇌 부위 이상으로

머리를 크게 만드는 수두증에 걸려있던 그의 아들 안드레아 미야토비치, 그는 챔피온스리그 결승골과 우승 트로피를 아들에게 바친다고 하였습니다. 발렌시아에서 28골을 터트리며 최고의 활약을 펼치던 그가 레알마드리드에선 약간 주춤한 기록을 보이는 이유로 또 다른 해결사인 수케르의 존재가 있지만 또한 96/97시즌 아들의 병이 발견되었던 이유도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족에게 돌아가라는 카펠로 감독의 말을 듣지않고 훈련에도 참가하며 팀을 위해

바르셀로나와의 일전에 대비했던 그는 홈구장 산티아고 베르나우에서 멋진 골을 터트리며 관중들의 환호를 반았답니다. 관중들은 미야토비치의 아픈 아들 안드레아를 계속해서 외치며 그를 위로했고 결국 미야토비치는 78분 교체되며 눈물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레알마드리드는 이러한 감동의 스토리와 함께 미야토비치 영입 시즌인  1996/1997 프리메라리가 우승을 차지하게 되죠

 

레알마드리드의 전설적인 수비수이자 당시 주장이였던 페르난도 이에로는 안드레아 미야토비치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싸인을 한 유니폼을 미야토비치에게 전달해 주며 건강이 회복되길 빌었답니다. 모두의 따뜻한 마음에 미야토비치도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이였죠

프리메라리가 경기 불참 선언 . NATO의 폭격에 대한 저항

미야토비치 레알마드리드 소속 마지막 1998/99시즌 나토(NATO)의 폭격이 고국에 강행됬고... 이에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자 세상에 대한 항의의 메세지를 담아 프리메라리가 경기에 불참하기도 하였습니다 팀 동료들도 그를 이해해줬고 그당시엔 그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였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아무런 도움도 안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였다. 정말이지 그때만큼 내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겨졌던 때도 없었다” - Mijatovic

 

http://en.wikipedia.org/wiki/File:Predrag_Mijatovi%C4%87_2007_b.jpg

 

그 후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레알마드리드의 단장을 맡기도 한 미야토비치는 2012년 러시아 프로축구 안지의 총괄 책임자로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칠레의 신화를 만들었던 수케르는 축구학교를 설립하여 아이들을 돌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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